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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조의 주춧돌을 마련한 세종은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의 셋째 왕자였습니다. 본래 그는 세자가 아니었기에 왕위를 계승 할 수는 없었으며 충녕대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문적 자질은 당시의 세자 양녕과 비교하였을
때 매우 뛰어난 수준이었습니다. 유학적 소양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충녕의 이러한 소양은 선왕과 신하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세자 양녕이 부정한 행위로 인해 폐위되었을 때, 그 뛰어난 학문적 능력으로 높이 평가된 충녕이 조선의 새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슬하에 아들을 둔 세자가 폐위되었다면 그의 아들이 세자로 다시 책봉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 점을 고려할 때 일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쓴 충녕의 세자 책봉은 상당히 혁신적인 인사였습니다. 그를 조선의 왕으로 이끌었던 총명함은 세종이 국가의 지도자로 재위하는 동안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해동의 요순(중국 신화 속에 등장하는 전설의 군주)이라 불리며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세종. 우리는 참으로 여러 방면에서 그의 업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종은 실리적인 외교를 통한 국력의 신장에 주력하였습니다.

당시의 외교관들에게 일본의 학문인 왜학을 장려하는가 하면, 다른 나라의 말을 번역하는 부서인 사역원의 관리는 사역원 내에서 해당 외국어만 사용하도록 하는 등, 당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혁신적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는 방법들은 세종의 실리적인 스타일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세종은 자주국으로써 조선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여 왜구들을 몰아내고, 납치된 조선인과 명나라 사람들을 구해낸 뒤 대마도가 확실히 경상도 관찰사의 관할 구역이라는 것을 문서로 대마도주에게 알리게 한 일, 최윤덕과 김종서로 하여금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일대의 여진족을 몰아내게 하고, 4군과 6진(六鎭)을 개척하여 삼국시대 이후 급격히 축소된 국토를 확장한 일 등은 조선의 역사를 훌륭하게 장식하는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천재 발명가로 유명한 장영실의 등용 또한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려는 세종의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세종시대에는 혼천의, 혼상,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간의대, 갑인자 등 엄청난 양의 발명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관기의 아들인 장영실을 등용했던 그의 혁신적인 인재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사람을 아끼는 군주였습니다. 세종은 정치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이 지닌 권위의 독단을 멀리하고, 조정의 대신들과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갔던 인물입니다. 세종 시절에 사대부 중에서 형벌로 죽은 자가 없었다는 것은 그의 애민과 포용 정신을 잘 드러냅니다. 원금을 넘는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시키고, 출산한 관비(官婢:관가에 속하여 있던 여종)에게마저 100일간의 출산 휴가를 주는 등의 정책은 국민복지에 힘쓰는 오늘날 봤을 때 더욱 탄복할 만한 인간본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학문적 재능과 실리에 밝은 의식,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무엇보다도 잘 드러내는 것은 바로 한글의 창제일 것입니다. 세종 14년 음력 11월 7일의 정사를 볼 때 ‘비록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도 법률을 알아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범죄의 경중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법을 다 알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따로 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두로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여 그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라고 언급한 부분에서 말과 글이 달라 불편함과 억울함을 겪는 백성들을 위해 대책을 마련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그의 한글창제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글은 세종의 탁월한 학문적 소양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고, 한글의 반포는 이를 반대하는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루어낸 중대한 사업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종의 뛰어난 능력과 어진 품성을 함축하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재성만으로 주목받기에는 조선왕조에는 훌륭한 다른 왕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종이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회자되는 이유는 그의 천재성의 원천이 백성을 생각하는 애민정신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이상으로만 남을 수도 있는 이 정신을 끊임없이 실천해 나갔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바꾸면 좋겠지만 이미 나에게 익숙해져 버렸으므로 그 필요성을 잊는 것, 바꿔야 하지만 타성에 젖은 자신의 안락을 위해 그냥 넘어간 것, 세종은 그것을 혁신하여 조선의 르네상스를 일으켰고, 이는 백성을 사랑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종의 이러한 어진 마음은 한국인의 가슴에 따뜻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세종과학기지는 남극 킹조지 섬에 있는 과학 기지입니다. 세종대왕상은 유네스코가 제정한, 문해율(文解率) 증진을 위해 힘쓴 사람이나 단체에 주는 상이며, 세종 솔로이스츠는 줄리아드 음대에 재직하고 있는 강효 교수의 책임 아래 운영되고 있는 앙상블 단체입니다. 세종대왕함은 한국 해군의 이지스 구축함 KDX-3의 1번함이며, 세종시(世宗市)는 2015년까지 정부 부처가 이주할 행정 중심복합도시의 이름입니다. 세종과학고등학교는 대한민국의 과학 고등학교이며, 세종대학교는 대한민국의 4년제 종합대학교입니다. 청와대 본관 앞쪽 왼쪽 건물의 이름은 세종관입니다. 대한민국의 기념일인 스승의 날은 세종의 탄신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인 5월 15일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1만원권 지폐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세종대왕은 그의 탁월한 발명품인 한글과 함께 지금도 우리의 생활 곳곳에 남아 깊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